명나라 유격장군 '진린'
- me
- 1월 9일
- 5분 분량
Chen Lin - Ming Dynasty
자 - 조작 (朝爵); 호-용애 (龍厓); 시호-충강 (忠康)
1543년에 출생, 1607년에 사망한 중국 광동성 출신의 무관, 장군, 제독등 여러 직책의 임무를 수행한
명나라의 장수였어.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불리는 전쟁 당시 조선으로 파견된
유격장군으로 이순신과 협력,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어야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유격장군이랑 일반 장군이랑 조금은 다른, 외교적 협상가의 색깔이 더욱 강한 위치의 자리였데.

황조별묘의 진린 장국 초상화
나무위키에서 발췌
1543년 명나라 광동성 소주부 옹원현 용전포 에서 출생
(현재 광둥성 샤오관시 웡위엔현 저우피진 롱톈촌)
1562년 세종 가정제 말기때 관직에 출사; 여러가지 승진을 거쳐 조경유격장군, 고주참장 등을 역임
그때 세운 많은 공훈들 중, 영덕현의 도적을 토벌하였고, 도적 뇌원작을 평정, 영동의 도적들을 물리쳤던것이고, 신종 만력제 초기시대 때는 고요헌의 도적 등승룡, 계양현의 도적 종월천등을 평정했데.
문무, 모두 겸비한 장수로, 특히 남방 평정에서 많은 업을 세웠다고 해.
남방의 묘족을 정벌, '동안첨장사'라는 지위에 오른적이 있었는데, 그때 살아남았던 자가, 백성을 살해한
일로, 진린이 책망을 받고 죄를 얻게 되었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여러 망루를 깨뜨려 36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업적으로 용서를 받게 되었지.
재물의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시기에,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약탈을 하는 바람에,
나응학에게 탄핵받아 관직이 박탈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적을 사로잡으면서
죄가 사해졌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관직을 빼았던 적이 있었으며,
매번 조정의 신료들이, 진린의 재주를 아깝게는 여겼지만, 구해내지는 못했다고 해.
1592년 적을 패배시킨 일이 인정되어 관직이 회복되었고,
그후, 광동의 병사 5천을 이끌고, 조선을 일본의 침략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 조선으로 향하게 되.
1593년 2월 '어왜총병관'의 자격으로 마귀, 유정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병사 3천여명,
전함 수백척을 나누어, 충청도, 전라도, 경사도의 해구에 배치시켰어.
그리고 그 후, 더욱 높은 지위로 수군 5천명을 이끌거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게 되었어.
처음 진린이 이순신 부대와 합류할 때, 조선 조정에서 그들이 서로 충돌할까봐, 많이 우려하였다고 해.
사실 과거에 진린이 조선 관리 찰방 (=역참 하급 관리) '이상규'가 본인의 송별회에
늦게 참석하였다 하여, 그의 목에 밧줄을 묶고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진린이 폭악했다고 알려졌던데다,
서로 다른 지휘 체계,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이 더 심해질거라는 예상이 있었거든.
하지만, 이순신은 이러한 진린의 성격을 어느 정도 미리 파악해 놓은지라,
진린과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여 주었으며,
진린의 업적이 작게 된것을 두려워 해, 이순신의 업적을 강제로 취하려 하였을 때도
기꺼이 업적을 나누었고, 동시에 진린의 잘못된 지휘방식이나, 조선백성에게 행패를 부릴때에,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을 넘겨 받기도 하는 등, '채찍과 당근'을 사용, 명나라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었어.
이에 진린은 이순신의 지휘력과 인품에, 초기 제멋대로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순신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고, 연신 최고의 찬사를 하였데.
나이가 이순신장군보다 2살이 많았음에도, '이야' 혹은 '노야(=어르신)'라는 호칭으로
높여 불렀고,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앞지르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의하였다고 해.
또한, 이순신이 조선 조정의 합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있다고 느껴저서,
자기와 함께 명나라로 가서 황상을 모시며 능력을 떨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권하기도 하였데.
한번은 진린이 하늘을 보는데, 대장별이 떨어졌다고 생각 되어 이순신의 안녕이 걱정되어서
그에게 제갈무후의 고사를 따라 제단을 쌓아 기도를 올려, 명을 늘려보라고 간곡히 청했던 적이 있데.
하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덕망과 재주가 무후만 못하니, 어찌 하늘이 들어주겠느냐면서 사양했다고 해.
'제갈무후'란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뛰어난 재상이었던 제갈량을 가리키며, 그의 직위였던 '무향후'를
줄여서 부른 별칭으로, 그의 뛰어난 재능과 덕을 칭송하는 의미.
이것은, 진린이 이순신의 충의와 지혜를 당시 명나라에서 제일이라 칭송한 제갈량에 비유할 만큼
이순신을 높이 여겼다 할수 있어.
또한, 진린이 이순신의 업적을 칭송,
만력제가 그에게 보낸 8가지 선물들을 보내도록 일조했다는 설도 있지만
역사적인 근거가 없긴 해.
마지막 결전이었던 '노량해전' 당시, 명나라 군대는 일본을 한반도에서만 쫓아내기만 하면 되었기에,
다 이긴 전투에서, 굳이 도망가는 일본군을 막지 말고 그냥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었어.
그래서 진린도 도망가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주저하였다고 해.
결국 진린도 끝까지 전투를 하긴 했는데, 이는 이순신에 대한 개인적인 부채감과 존경심도 있었겠지만,
본인의 성격 자체가 강경파이기도 한다고 알려 있지만,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어.
진린이 굳이 도망가는 일본군을 막을 이유가 없었기에,
도망가는 길목을 열어줄것을 대가로 뇌물을 받은 건 사실이야.
그런데, 끝까지 진린이 전투에 참여하게 된 진짜 계기와 대처선이 정말 궁금하긴 해.
이순신은 당연히, 일본군과의 오래 계속된 전란으로 깊은 원한이 있었어.
특히, 이순신의 고향인 아산에 일본군이 보복 기습을 가했다는 점, 그리고 이때 전사한 막내아들 등.
도망가는 모든 일본군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인지상정이겠지.
여러 설이 있긴 한데, 몇가지 중 하나는, 진린이 뇌물받은 사실을 미리 이순신에게
전하며 대책을 논의, 이순신을 따라 함께 전선에 나갔다는 설.
또 다른 건,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 따른건데, 뇌물을 받은 일로
이순신이 크게 노해 항의하자, 진린이 그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 결국 화가 터진 진린이 황제의 검을
운운하며 이순신을 죽일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자, 둘이 크게 한참을 다투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어.
그런데, 사실 전자가 더 많이 거론되는 데, 진린 개인의 탐욕성에 대해선 오늘날 학계에서
이렇다 저렇다 갑론을박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어떤 기록엔 조선 왕실에서 보내준 선물들도
대부분 거절하고 종이만 받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인적인 치부가 없었다는 것이지.
또한 매우 친일성향이 짙었던 '이광수'의 '이순신 전기'에서 진린이 상당히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기에 그 영향이 이충무공행록에 미칠수도 있다는 론도 있어.
어쨋든간에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는 전에 했던 것처럼의 포격적 대신, 포위한 후 전면으로
돌격하는 전술을 펼쳣어. 곧 선상 백병전과 난전이 벌어진 거야.
그 와중에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이 전사했고, 진린 역시 왜군에 포위되어 고생하지만.
결국, 조.명의 승리로 전투가 끝이 났어.
곧바로 진린은 전투 중 자신을 구해준데에 대해 감사표시를 하기위해 이순신을 찾지만,
그는 이미 전사하고 말았어. 이에 크게 대성통곡하고, 명나라 군사들이 한동안
고기을 먹지 않았다고 해. 이후 진린은 마음을 추스리고 '남해왜성 소탕전'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순신의 고향에 들려, 곡하고 그 아내와 아들을 조문했다는 기록이 있어.
또한 당시 선조를 만나, 이순신의 공적을 칭찬하였데.
하지만, 위에 나열한 진린과 이순신사이의 훈훈한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닐수도 있어.
당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와 같이 일치한 내용이 나와있지 않고,
오히려, 그 둘 사이는 여전히 껄끄럽고 융합되지 않았던 사건들이 더 많이 기재되어 있기에,
과연 훈훈한 그 얘기들이 진짜 있을수 있었을까 의심하는 학자들이 더 많데.
그럼 왜 이런 이야기들이 공공연히 나도냐구?
그건, 전쟁이 끝난 17세기 이후, 숭명의식, 즉 명나라를 받들고 존경하는 의식이 높아지면서,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사건들을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러한 당시 사회성이 지나간 역사를 훈훈하게 기록하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일거야.
효종 시대때 '김육'이 지은 '이순신 신도비'가 그 예를 들만한 것 중에 하나지.
아직도 어떤 쪽이 진짜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노량해전 직전까지 전공과 작전 수행 문제로 이순신과 불화,
협박을 통해 조선 수군이 획득한 수급을 강탈, 이순신으로 하여금 거짓 장계를 올리도록 강요, .
또한 다른 좋지 못했던 전린의 행동에 명 수군 도독 교체를 건의할 계획등이 있었던 들 또한
기록에 나와 있음으로 제외해서는 안 될것 같기도 해.
아무래도 훈훈한 얘기들을 더 선호하게 되기에, 그 것들이 사실이였기를 바래보기도 하지만,
역사는 항상 양면성이 있기에, 양쪽 내용들을 모두 익히고 있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항상 양쪽면을 들여다 보는 연습을 하는 게, 인생도 폭넓게 살수 있게 되는 것 같아서.
진린은 명나라로 돌아가서는 임진왜란 때의 공적을 인정, 더욱 높은 지위로 승진되었고,
또한 그 곳에서도 반란을 진압, 토벌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웠데.
1607년 사망하자, 묘족 (중국 내 5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 민족)을 평정시킨 공으로
'태자소보'라는 높은 직을 받게 되고, 시호도 '충강 (忠康)'을 받게 되었다 해.
한 가지 또 흥미로운 사실은 진린의 후손이 우리나라 광동 진씨의 시작이 되었다는 거야.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명나라가 위태로운 운명에 놓여 있을 때, 청군과 애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그의 손자, 진영소는 '감국수위사'라는 관직을 지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죽음과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다'며 명나라의 멸망을 슬퍼하며,
가족들을 데리고 고금도를 거쳐 해남에 정착했데.
그 후손들이 광동 진씨! 현재 해남에 정착한 광동 진씨의 집성촌을 '황조리'라 하고
진린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그 이름이 '황조별묘'라고 해.
이 글 맨 위에 있는 진린이 초상화가 그 사당에 있는 거래.
이들은 중국 쪽의 진린의 후순들과도 교류, 제례를 같이 올리기도 했고,
이순신의 덕수 이씨와의 교류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해.
역사가 재미있는 이유는 이렇게 모든 게 현재까지 이여지고 있다는 거야.
모르겠어. 난 그래서 역사가 재미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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